페이스북을 통한 새로운 제자도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나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들이 제자화의 대인관계수단이 된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넓은 의미로, Robert D. Putnam이 그의 처녀작 ‘혼자서 볼링치기’에서 훌륭하게 묘사했던 사회화 진공을 페이스북과 소셜네트워크들이 메워주고 있다. Putnam의 자료는 어떻게 미국인들이 가족, 친구, 이웃, 민주적 구조, 교회와 점차 단절되어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미국인들의 본성과 존재에 의한 극단적인 개인주의, 자아도취, 소비자중심주의, 도덕상대주의 그리고 권리 대한 깊은 인식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자율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칙을 작용시킨 공동체와 조직을 단편화시켰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민참여를 통한 사회자본의 손실로 새롭고, 더 편하고, 개인으로 규정된 시민의 형태가 생겨났다. 하지만, 급진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자아도취에 빠졌으며, 소비자중식적이며, 도덕적으로 상대성과 권리가 주어진 미국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독립체로서 페이스북 같은 영지주의적 기업으로부터 파생된 집단 해체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결책을 제공한다. 가장 성공한 새로운 시민포럼인 페이스북은 이러한 교회에서 정착할 곳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한때 개인의 참여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던 활동들에 대해 사이버 소셜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현상이 복음주의의 구석구석에 나타난다. 교회의 페이스북 페이지들은 넘쳐나고 있다. 10년 전에는 “이 교회의 웹사이트가 있나요? ”라는 질문이 일반적이었는데, 지금은 “이 교회가 페이스북에 있나요?”가 되었다. 페이스북은 독특한 것을 제공하고, 확실한 위상을 가졌으며, 6억5천만에 달하는 단골 사용자들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게 만든다. 페이스북은 정체성과 소속감으로 사회활동에 대한 기대감을 만드는 혁신적인 문화적 영향력이며, 이것이 교회가 페이스북의 기발한 방법론에 편승하고 있는 이유이다. 여느 때처럼 복음주의는 제자들이 필요한 것 대신에(도전적이고, 매력적인 제자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편리와 낮은 의무감)을 제공하고 싶어한다.
교회 페이스북 페이지의 컨텐츠는 광고를 게시하는 것부터 설교 방송 혹은 제자도 포럼까지 포함된다. 구독자들은 페이스북 형태의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적절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마케팅과 편리하게 접속하고 싶은 신자들, 그리고 전도하는 수고와 크리스천의 교육을 위한 다른 도구일 뿐이다. 여하튼 교회는 인쇄된 간행물, 크리스천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같은 과학기술을 이용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의 이용이 하나님의 말씀 곧, 교리문답 능력으로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 마무리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Marshall McLuhan의 관찰을 더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보는 대로 된다. 우리가 도구를 만들고 나면, 후엔 도구가 우리를 만듭니다.” McLuhan의 생각이 견인력을 가지며, 소셜 네트워킹 매체가 가상현실과 비현실(McLuhan의 금언 “매체는 메세지다”와 상응하는)에 대한 진정한 메시지라면, 그 때 페이스북을 통한 교회는 제자도와 크리스천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는 일에 역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계획적으로 신자가 갖는 성경적 제자도를 돕는 포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학술서가 아닌 트윗만 만들어낸다. 뭔가를 요구하지 않고, 사용자의 편의만 추구한다. 거기에는 책임이 없으므로 영적 훈련을 돕지도 않는다. 그 때 어떻게 우리는 뒤집힌 교리문답의 무지 속에서 (LCD모니터에 제한되는)현실로 감각적 계약을 제거하는 역할을 감당할 도구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내가 있는 SanDiego대학의 수업 중 이와 관련된 대화인 “미국의 개신교”가 개설됐다. 학생들은 내가 가진 의심을 재확인해주었다. 그들은 낡은 “벽돌과 시멘트” 교회가 점점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복음주의가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완성한 충분히 개인주의화 된 영성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를 온라인에서 선택하는 시대에 교회도 온라인에서 선택하면 안되나요?” 라고 말한다. 다니고 싶은 교회를 검토하기 위해 검색엔진을 사용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결정한 사이버 모임 속에서 당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라도 당신의 페이지를 보기 원하는 요청을 거절해도 되고, 주기도문 중에라도 손을 잡고, 성찬식 중이라도 성배를 공유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색다른 뭔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이튠즈 컬렉션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하는 방법처럼, 자신만의 훌륭한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주의를 복음주의적인 수용한 것에 맞춰, 개인용도의 성경들과 평면화된 교회건축 지형도를 통해 훌륭한 교회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떻게든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스스로 자신을 먹이는 이상적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소비자주의 기독교에서 이후의 논리적 단계이다. “나는 교회에 전혀 가지 않는다.”고 한 학생이 고백했다.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접속해 있고 어디서나 그것을 할 수 있다.” 교실의 학생들은 일반적인 동의의 방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가능성이자 현실이다. 어디서나 페이스북이 가능할 때, 신자들과의 연합은 불필요하다. 그들은 웹사이트를 찾아 다니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교리문답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전혀 필요 없었다.
원문보기 Face-to-Face Discipleship in a Facebook World (John B. Bombaro)
http://www.modernreformation.org/default.php?page=articledisplay&var1=ArtRead&var2=1260&var3=issuedisplay&var4=IssRead&var5=119
Rev. John J. Bombaro (Ph.D., King's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is the parish minister at Grace Lutheran Church in San Diego, California and a lecturer in theology and religious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San Di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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