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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를 살리는 세가지(손봉호)

2011. 12. 22. 17:19 | Posted by dfcjoshua


http://itunes.apple.com/us/podcast//id463255925?i=108438770
손봉호(고신대학교 석좌교수) : 한국교회를 살리는 세 가지 가치

강연내용 소개
한국 기독교가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부패했다는 평가도 듣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답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아프게 느끼지 않고 있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집중해야 할 세 가지 핵심 가치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기독교 정당, 다종교 사회의 평화 해칠 우려 있다
기독교 정당, 권력 통해 세속적인 이익 추구하려는 것 아닌가
희망버스 막는 일에 왜 교회가 나서나
인권보호, 가난구제 등 보편타당한 일에만 나서라
기독교인은 진보와 보수 넘어선 보편적인 가치 추구해야
MB정부 들어 덕 본건 기독교가 아니라 일부의 기독교인들
MB정부 들어 기독교에 대한 평가가 월등히 나빠졌다
교회가 서울시 주민투표참여 독려하면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1년 8월 30일 (화) 오후 7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손봉호 고신대 석좌 교수

▶정관용> 시사자키 2부 시작합니다. 오늘 2부에서는 우리 기독교와 관련된 몇 가지 쟁점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일부
교회에서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독려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른바 교회의 현실정치 참여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었지요. 그리고 주민투표가 끝난 후에는 개신교 정당 창당 움직임까지 일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개신교 목회자들이 모여서 주요 쟁점들을 논의하는 포럼이 열리고 있고요, 오늘 서울에서는 새로운 보수정당 발기인 대회가 열렸는데 뭐 조용기 목사, 김삼환 목사 등 개신교계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이 참석해서 눈길을 끌었지요. 자, 이런 교회의 현실정치 참여 문제,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우리 교계의 원로이시지요. 고신대 석좌 교수, 손봉호 교수 모시고 함께 생각을 좀 나눠보겠습니다. 손봉호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손봉호> 안녕하세요?

▶정관용>
건강하시지요?

▷손봉호> 예, 잘 있습니다.

▶정관용> 얼굴색 좋으신데요.

▷손봉호> 감사합니다.

▶정관용> 지금 벌써 70대 중반이신데...

▷손봉호> 칠십넷입니다.

▶정관용> 언뜻 보면 50대처럼 보여요. 하시는 일이 많아서 그러신 것 같아요.

▷손봉호> 예, 제가 늘 말합니다만, 스트레스를 별로 안 받아서 잘 안 늙는 것 같습니다.

▶정관용> 아니, 하시는 일이 많은데 왜 스트레스를 별로 안 받으세요?

▷손봉호> 그런데 할 일이 많은데, 스트레스를 받아야 될 텐데, 사람이 좀 못 되어가지고 나한테 이익이 생기는 일을 해야 스트레스를 받지, 그렇지 않은 일에는 스트레스를 좀 적게 받지요. 그게 사실 좋은 건 아닌데, 저도 조금 너무 이기주의자인 것 같아요.

▶정관용>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최근 어디 자료를 보니까, 어디 인터뷰하신 것을 보니까 이사장 직함만 9개를 가지고 계신다고요?

▷손봉호>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어떤 어떤 것들입니까?

▷손봉호> 주로 복지단체, 또 시민운동단체 그런 겁니다. 좀 대부분 내가 돈을 벌여다 먹여 살려야 하는 그런 단체입니다.

▶정관용> 최근에 또 부패추방운동의 상임의장에 오르셨지요?

▷손봉호> 그렇습니다. 저는 의장까지 될 생각을 안 하고, 좀 돕겠다고 나섰더니 그만 또 의장이 되어가지고 거절을 못하고 지금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정관용> 그 많은 일을 하시는데 본인을 위한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없다?

▷손봉호> 예, 그러니까요, 그런 게 자랑인지, 비난을 받아야 할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관용> 아니, 왜 비난을 받습니까? 뭐 이것저것 여쭤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만, 오늘의 초점은 최근에 기독교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현실정치화의 문제점들,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한 생각, 이걸 좀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어제부터 뭐 목회자 한 2천명 가까이 모여서 포럼 하신 것, 알고 계시지요?

▷손봉호> 예, 좀 얼핏 들었습니다.

기독교 정당, 다종교 사회의 평화 해칠 우려 있다

▶정관용> 그리고 또 오늘은 새로운 보수정당 발기인대회가 있었는데, 거기 또 유명 목사님들이 참여했다고 그러고요. 어떻게 보세요, 우선?

▷손봉호> 저는 뭐 꾸준히 기독교 정당을 반대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 사회가 다종교 사회이기 때문에, 한 종교가 정치적인 권력을 잡게 되면, 다른 종교가 긴장하고, 이제까지 우리가 자랑했던 종교 평화, 이게 깨질 위험이 있으니까 반대하고요. 그것보다도 우리 국민의 정치에 대한 의식이 아직까지 정치란 건 권력을 얻고 권력을 누린다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수고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고요.

▶정관용> 정치는 곧 권력이다?

▷손봉호> 그렇지요. 그런데 종교가 그런 이름을 얻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지금 아주 훌륭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정치를 할 그런 지도자를 전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에 정당을 창당해가지고 가령 국회의원을 내보내면 저는 한 사람도 당선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 쓸데없는 일입니다.

▶정관용> 원칙론적으로 다종교 사회이기 때문에 안 된다?

▷손봉호> 예.

▶정관용> 그리고 권력을 여전히 누리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는 정치는 종교가 해서는 안 된다?

▷손봉호> 그렇지요.

▶정관용> 그런데 그것은 기독교계가 마지막 세 번째 말씀하신 것, 지도자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준비가 되어도 그건 해서는 안 되는 건가요?

▷손봉호> 그렇지요. 우리들이, 우리 국민이 정치라는 건 철저히 국민에게 봉사하고, 국민을 위해서 희생하는 거다, 그런 인식이 있으면은 뭐 종교가 못할 이유가... 아, 종교가 하면 안 되지만은 종교인들이 하는 것은 뭐 괜찮다고 생각해요. 가령 순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가지고 우리는 철저하게 손해 보고, 희생하고 봉사하겠다, 그렇게 하고 그것이 우리 국민들에게 납득이 된다면, 다른 종교도 긴장할 필요가 없지요. 뭐 권력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서라면.

▶정관용> 아, 그런 각도에서?

▷손봉호> 예.

▶정관용> 그런데 지금 내적 준비는 그런 방향으로...

▷손봉호>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그럼 지금 이런 움직임을 보이시는 기독교계에 있는 일각의 분들은 왜 그런다고 보세요?

▷손봉호> 그러게요. 저는 조금 걱정이 돼요. 기독교계의 무슨 권한을 좀더 확대해야 되겠다, 좀 이익을 봐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있는 것 아닌가 좀 걱정이 됩니다. 아니면 아주 좋게 해석해서는 지금까지의 정치가 기독교 정신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좀 기독교 정신을 한번 반영해보자, 이런 것은 아주 좋게 해석하는 것이고.

기독교 정당, 권력 통해 세속적인 이익 추구하려는 것 아닌가

▶정관용>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손봉호> 그러게요. 그렇지 않으면 이건 권력을 얻어가지고 우리 기독교가 세속적인 이익을 좀 보겠다는 건데 이건 전혀 기독교 정신과 맞지 않습니다.

▶정관용> 보도된 걸 보면 교회운동본부의 최병두 목사가 교회, 나라와 교회를 위한 포럼 기도회를 가진다. 교파를 막론하고 모이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교회가 난립해서 기도만 했지만, 이제는 함께 뜻을 같이 해서 연대를 같이 하고 힘을 길러서 부정을 물리치고 좌경세력을 물리치고 교회의 불의한 일을 막자는 의미다. 이런 표현들이 나옵니다.

▷손봉호> 그러게요. 그게 좌경세력을 막는다고 하는 것도 그게 과연 지금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인지 의심이 가고요. 사실 힘을...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어떻게 하면 국민을 더 잘 섬길까, 얼마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힘을 합쳐가지고 더 많이 희생할까, 뭐 그런 목적으로 한다면은 그래도 이해를 할 만한데요, 이것은 전혀 그런 목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버스 막는 일에 왜 교회가 나서나

▶정관용> 또 역시 보도된,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 어버이연합이라는 단체에 천만원을 주고 그분들이 부산에 내려가서 희망버스를 막았다,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손봉호> 예, 그것도 우리 사회의 일각의 주장을 보편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기독교인은 가령 민주화라든가 인권을 보호한다든가 환경을 보호한다든가 모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그런 일에만 집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관용> 서로 갈등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손봉호> 예, 거기에서는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좌도 우도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손봉호> 그렇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은 뭐 좌우, 혹은 진보, 보수, 거기에 분류되어서는 안 돼요. 그걸 초월해야지요.

▶정관용> 왜 그렇습니까?

▷손봉호> 아니, 기독교는 기독교의 원칙에 입각해서 상황을 판단해야지 왜 좌니, 우니, 진보니, 보수니, 그런 기준에 의해서 상황을 판단합니까?

인권보호, 가난구제 등 보편타당한 일에만 나서라

▶정관용> 기독교의 원칙이란 어떤 것이지요?

▷손봉호> 뭐 정의, 희생, 사랑, 봉사, 이런 거지요. 그러니까 가령 인권을 보호한다, 그건 뭐 아무도 반대할 수가 없고, 그건 뭐 성경이 충분히 가르치는 것이고. 또 아주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 그걸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러면 그건 성경이 가르치는 거고.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그런 일만 해도 할 일이 지금 산더미 같은데, 왜 의견 차이가 있는 그 파당, 거기에 휩쓸리겠습니까?

▶정관용> 또 한 가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발언입니다. 이번 정부가 점점 좌편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반공보수당을 꼭 창당하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손봉호>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정관용> 아주 분명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 현재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자, 라고 모이시는 분들은 이념적으로 상당히 우파적인...

▷손봉호> 그런 것 같습니다.

▶정관용> 현 정부보다도 더 우파적인 것을 주장하는...

▷손봉호> 그렇지요.

기독교인은 진보와 보수 넘어선 보편적인 가치 추구해야

▶정관용> 그런 정당, 그런 이념에 기초한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것 같아요.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손봉호> 저는 그게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기독교적 기준에 의해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냐, 진보냐, 거기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진보가 주장하는 것이 옳으면 얼마든지 우리가 따를 수가 있고, 보수가 주장하는 것이 옳으면 따를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니까 그 정도의 초월, 적어도 보수, 진보를 훨씬 넘어서 훨씬 더 보편적인 그런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정관용> 그러니까 이런 창당 움직임을 보이시는 분들이 왜 그러는지, 뭐 이명박 대통령, 다들 아시겠습니다만, 장로이시고요. 그래서 이 정부 출범하면서부터 또 그것 때문에 조금 논란도 있었지 않습니까? 뭐 서울시의 경우에는 뭐 서울시를 봉헌한다는 표현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고 말이지요.

▷손봉호> 그렇지요.

▶정관용> 그래서 어떤 정권보다 친기독교적인 정권일 것이다, 이런 식의 인식이 있었는데, 이 정권 아래에서, 이 정부 아래에서 지금 보수적인, 우파적인 색깔을 띠는 기독교 정당 창당 움직임이 일고 있단 말이에요. 그 맥락, 왜 그럴까요?

▷손봉호> 뭐 역시 지나치게 보수적이니까 그렇지요.

▶정관용> 이분들이?

▷손봉호> 그럼요. 지금 이 정부는 자기들이 느끼는 것만큼 그렇게 충분히 보수적이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수적인 것이 곧 기독교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건 기독교인들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들 나름대로의 기독교를 지금 상정해놓고 거기에다가 맞추는 거지요.

기독교 교리 안엔 보수/진보 다 녹아 있다

▶정관용> 기독교의 교리를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보수적으로 해석할 수 있나요?

▷손봉호> 보수적인 것도 있고, 아주 진보적인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나게 좀 급진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우리가 그렇게 보수, 진보 잣대로 성경을 보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확실히 보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상당히 보수적이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나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은 결코 그렇게 보수적인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사유재산을 허락하지만, 그러나 재산을 자신을 위해 쓰지 마라. 그건 재산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한 도구이지 그것이 너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에요. 그런 면에서는 성경은 대단히 사회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정관용> 그런 면도 있고.

▷손봉호> 그럼요.

▶정관용> 보수적인 면은 또 어떤 게 있지요?

▷손봉호> 뭐 부모를 공경하라, 어른을 공경하라, 법을 지키라, 그런 건 또 상당히 보수적이지요.

▶정관용> 지금 뭐 이 정부 아래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다, 라는 걸 제가 질문으로 드렸는데, 얼마 전에 손 교수님께서 한 신문에 기고를 하셔가지고 기독교가 장로 대통령으로부터 덕을 보기는커녕 손해를 보고 역차별을 감수해야 될 것이다, 라는 표현을 쓰셨었지요?

▷손봉호> 그렇습니다.

▶정관용> 그게 어떤 의미였습니까? 이게 언제 쓰셨던 칼럼인가요?

▷손봉호> 몇 년 전입니다. 벌써 한...

▶정관용> 이 정부 출범 초기였지요?

▷손봉호> 그렇지요. 그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라고 하면은 상당한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기 때문에 그와 관계된 사람들은 그것의 덕을 보면 그것은 그 자체로 정의에 어긋나고, 그리고 그 대통령을 돕는 길이 아닙니다. 정말로 이명박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후세에 남게 하려면,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정의롭고,
공정하고, 또 투명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 그 사람, 참 훌륭한 대통령이었다, 이래야 본인도 명예스럽고 우리 기독교도 덕을 보거든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니까 이 참에 우리 덕을 좀 보자, 그럼 대통령도 실패하게 만들고, 실패한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도 손해를 보는 거지요. 이렇게 기독교는 이때일수록 오히려 훨씬 더 손해를 볼 각오를 해야 대통령이 훨씬 더 일하기도 쉽고, 또 아, 기독교 대통령은 좀 다르더라, 이렇게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다음 대통령은 부디 개신교인이 아니기를 지금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정관용> 그 마지막 표현은 무슨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지난 몇 년 손 교수님이 생각하신 방향대로 안 왔다는 이야기지요?

▷손봉호> 아니, 뭐 하여튼 우리가 지금의 정치상황으로 봐서 기독교 대통령이 기독교에 덕을 줄 수는 없었고요, 또 주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손해를 봤지요.

MB정부 들어 덕 본건 기독교가 아니라 일부의 기독교인뿐

▶정관용> 그래도 뭐 이른바 고소영 내각, 해가지고, 특히 소망교회 다니신 분들이 많이들 발탁도 되고. 이런 건 어떻게 보세요?

▷손봉호> 그건 그 몇 사람이 덕을 봤겠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욕을 먹었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아주 그래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지,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지요. 물론 뭐 기독교인이 다 그렇게 덕을 본 것은 아닙니다. 저도 기독교인이지만 내가 대단히 덕을 본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조금 억울한 면도 있어요. 기독교가 덕을 봤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그 인사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좀 덕을 본 것 이외에는 사실 한국 기독교가 덕을 본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도 같이 욕을 먹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는 대통령이 좀 될 수 있으면 개신교인이 아니었으면 하는 거예요.

MB정부 들어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월등히 나빠졌다

▶정관용> 손 교수님 보시기에는 이 정부 들어서 비기독교인들, 내지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에 대한 평가가 더 나빠졌다고 보세요?

▷손봉호> 예, 뭐 월등하게 나빠졌지요. 과거에도 기독교인 대통령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어요.

▶정관용> 그랬지요.

▷손봉호> 그런데 지금 이명박 대통령, 그것을 조금 과시를 했습니다. 그 대통령의 자리를 어떤 종교가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사람들이 그 종교를 좀 경계하는, 그런 태도를 갖게 될 것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조금 말하자면 우리 표현으로 삐딱하게 볼 그런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이번 경우는 사실은 조금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가 좀 억울하게 손해를 본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개신교 인사들, 차라리 역차별 했어야

▶정관용> 대통령이 더 조심했어야 한다, 라고 보는 거군요?

▷손봉호> 적어도 인사에 있어서는 기독교인들 좀 더 배제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관용> 칼럼으로 쓰신 것처럼 오히려 역차별을 했어야 한다?

▷손봉호> 그렇습니다.

▶정관용> 그런데 그걸 안 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는 기독교계 전체가 비판을 받는다?

▷손봉호> 그렇지요.

▶정관용> 그런데 그렇게 비판을 받는 목소리들을 지금 정당 창당하시는 분들이나 지금 모여 계신 한 2천여 분 되시는 목회자들은 잘 못 느끼시나봐요? 오히려 손해봤다고 자꾸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더 얻어야 된다고 보시는 것 같아요.

▷손봉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그분들이 보기에는 지금 정부가 충분히 기독교적이지 못하고, 자기들이 해석한 기독교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서울시 주민투표참여 독려하면 안 된다

▶정관용> 그리고 주민투표,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과정에서 몇몇 교회에서 말이지요, 주민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어떤 것을 찍어야 한다, 이런 발언들을 또 내놓지 않았습니까? 그것 역시?

▷손봉호> 보통선거라면은 투표 참여를 교회가 권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뭐 시민의 의무니까요. 그러나 이번 선거는 투표율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에, 이건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 곧 정치적인 행위가 되어버렸지요.

▶정관용> 그렇지요. 어느 한쪽 편이 든 것이 되지요.

▷손봉호> 그러면 그거는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기독교인은 뭐 자기의 신념에 따라서 다른 기독교인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그런 걸 독려할 수가 있지만은, 교회는 그런 기관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아주 잘못한 것입니다.

유럽의 기독교 정당과 비교하기 어려운 이유?

▶정관용> 뭐 기독교 정당을 처음부터 쭉 반대해오셨다, 라고 합니다만, 또 일각에서는 유럽 같은 나라, 뭐 기독교민주당, 뭐 그런 정당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 우리나라라고 왜 못 만드느냐,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손봉호> 유럽은 지금은 뭐 다종교 사회가 됐습니다만, 지금 있는 기독교 정당들이 시작될 때, 대개 19세기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그때는 유럽이 기독교 사회였지요.

▶정관용> 그랬지요.

▷손봉호>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뭐 종교 간의 갈등, 그걸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요. 그리고 아무래도 이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이 우리보다는 조금 더 성숙했지요. 그러니까 정치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권력을 많이 잡고 권력을 누린다, 그것보다는 그래도 또 어느 정도 국민에게 봉사하고, 나라를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이다, 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그렇게 크게 문제될 일이 없었지요.

▶정관용> 핵심은 두 가지네요. 종교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종교간 갈등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느냐, 없느냐를 봐야 한다. 두 번째, 정치의 본령이 권력이 아닌 봉사라면...

▷손봉호> 그렇지요.

▶정관용> 기독교적 정신이 봉사라고 해서, 봉사를 위주로 하는 정당이라면 뭐 그건 가능하다, 이 두 가지로군요?

▷손봉호> 그렇습니다.

▶정관용>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손봉호> 어느 것에도 우리나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정관용> 뭐 저는 거듭해서 여쭤봅니다만, 우리 손 교수님, 평생을 신앙을 가지고 살아오셨고, 우리 교계의 흐름과 변화의 모습도 쭉 보시지 않았습니까? 요즘 좀 유독 강한 것 같아서요.

▷손봉호> 예, 그게...

▶정관용> 이런 보수적 기독교계의 목소리가 유독 좀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서. 왜 그렇다고 보시는지요?

▷손봉호> 한국 교회의 성공이 한국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관용> 성공이 타락의 원인이다?

▷손봉호> 예, 즉 과거에 우리 한국 교회가 아주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세속적인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할 때에는 교회가 아주 순수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했기 때문에, 바로 그랬기 때문에 교인 수가 늘고 사람들이 기독교를 존중하고 그러니까 교인 수가 늘었습니다. 교인 수가 늘고 하니까 교회에 돈이 많아지고, 사회에 영향력이 커지고, 가만히 보니까 정치적으로도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다, 하는 그런 가능성이 생겼단 말이지요. 이때 아주 조심해서 우리는 절대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그걸 경계해야 할 텐데,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유혹이 많아지니까 유혹에 넘어가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 교회가 너무 돈이라든가 세속적인 영향력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이런 것을 조심하지 않아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서 조심을 하지 않고, 그 다음에는 교회끼리 뭐 성장의 경쟁을 하고, 그 경쟁이라는 것이 정말 얼마나 많이 희생하느냐, 얼마나 많이 봉사하느냐, 이런 경쟁을 해야 될 텐데, 외형적으로 얼마나 크냐, 이런 것에서 경쟁이 되어버리니까...

▶정관용> 신도 수 늘리기?

▷손봉호> 예, 완전히 교회가 세속화되어버린 거지요.

▶정관용> 교회 크게 짓기.

▷손봉호> 그렇지요.

▶정관용> 그런 경쟁들. 또 그래서 커지면 커질수록 돈과 권력이 더 쌓이고.

▷손봉호> 더 쌓이고요.

▶정관용> 그러면 그걸 더 누리려고 들고?

▷손봉호>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걸 커지면 커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그걸 가지고 더 많이 봉사하고 그랬더라면 한국 교회는 계속 자랐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예배당이 큰 것은 좋습니다만, 사치스럽지 말아야지요. 교인이 많으니까 예배당이 클 수가 있지요. 그러나 사치스럽지 않아야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좀 환경을 위해서, 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좀 가난하게 살아야겠다, 그걸 강조를 했더라면 왜 욕을 먹겠습니까?

▶정관용> 급기야는 한기총 해체를 또 주장하셨지요.

▷손봉호> 예.

▶정관용> 그때는 왜 그러셨지요? 한기총 회장 선거하는데 돈이 뿌려져서. 그것 때문입니까?

▷손봉호>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런 분이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고 했을 때 그럼 한국 교회는 뭐가 됩니까? 한국 교회는 돈 선거하는 것에 전혀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는 인식을 이 사회에 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분들이 저렇게 자리를 더럽혀 놓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정말 점잖고, 자격 있는 분은 한기총의 회장 되려고 안 그럽니다.

▶정관용> 아예 나가지를 않는다?

▷손봉호> 아예 나가지를 않지요. 그럼 악순환이 벌어지는 거지요. 정말로 자격이 있는 분은 자꾸 멀리 하고. 그러니까 자격이 없는 분만 자꾸 그 자리에 나설 것이고. 그러니까 한국 기독교는 계속해서 욕을 먹을 것이고. 그러니까 나는 이 한기총은 없어져야 한다, 저는 뭐 감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미워서도 아니고. 지금 한국 기독교가 너무 세속적인 힘을, 큰 힘을 행사하기 때문에 한기총이라는 단체가 있으면 그 유혹이 너무 크다. 그러니까 그 유혹을 이길 만한 지도자가 우리가 있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지금 이렇게 한번 때가 묻은 자리에 정말 자격 있는 분이 절대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악순환이 벌어질 테니까, 해체하는 것이 옳다, 저는 그래가지고 냉정하게 따져서 해체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정관용> 그런데 해체 안 됐습니다. 그렇지요?

▷손봉호> 안됐지요.

길자연 목사 한귀총 복귀 옳지 않다

▶정관용> 길자연 목사가 회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어떻게 보세요?

▷손봉호> 그건 뭐 전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분이 계속해서 한국 기독교의 대표라면, 한국 기독교가 썩었거나 혹은 뭐 그분이 전혀 자격 없는 회장이거나 그 둘 중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뭐 양쪽이 다 어느 정도는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정관용> 안타깝네요. 교회가 커지고 권력이 생기고 그걸 더 누리려고 무리하게 되고 세속화되다보니 돈까지 뿌려서 선거를 하게 되고, 그렇게 대표자를 뽑고, 이런 상황이 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손봉호> (한숨)

▶정관용> 지금 줄곧 손 교수님 말씀은 우리 기독교를 위해서, 기독교의 성장을 위해서, 라는 표현을 쓰고 계신데.

▷손봉호> 그렇습니다.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철저히 가난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여튼 이... 적어도 세속적인 가치들, 돈, 권력, 명예는 교회가 추구하지 말아야 됩니다.

세속적인 교회 왜 찾아가나? 평신도들부터 정신 차려야

▶정관용> 그런데 이미 그렇게 커져있고, 돈과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분들한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뺏어야 합니까?

▷손봉호> 평신도들이 정신을 차려야지요. 그래서 그런 교회에는 가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이 평신도들도 그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동조를 해버리면 가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저는 좀 비관적입니다. 한국 교회의 장래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관적입니다.

▶정관용> 그래요?

▷손봉호> 그러니까 아주, 아주 밑창까지 내려가야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좀 합니다.

▶정관용> 밑창까지 간다는 이야기는 이런 행태들이 거듭되면서 국민적인 지탄과 비난을 더 받아야 된다?

▷손봉호> 그러니까 기독교는 완전히 세속화된 아주 교양 수준이 낮은 질 나쁜 사람들의 집단이다, 해가지고 사회로부터 완전히 멸시를 한번 받아가지고, 이제 기독교인이 된다는 사실이 굉장히 부끄러운, 그런 상황에 한번 내려가야 정신을 차리지 않겠는가. 이게 뭐 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좀 제대로 회개하고 올바로 살 때, 그때부터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가지고 타락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아주 혼이 나면은 다시 또 회개하고 조금 제대로 정신을 차리다가 또 혼이 나고. 이게 반복이 되거든요. 스스로 고치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저는 그것에 대해 좀 비관적입니다.

▶정관용> 손 교수님이 화가 많이 나셨군요. 기독교인 되는 게 부끄러운...

▷손봉호> 예, 이게 뭐 교만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 가끔 자문을 하긴 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이것이 뭐 어떤 개인의 욕심을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관용> 알겠습니다. 기독교 이야기를 한참 했습니다만, 뭐 범종교적으로 넘나들어야 하니까요, 불교 용어인 죽비라는 단어를 쓰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께서 오늘 손 교수님의 말씀을 죽비처럼 받았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손봉호> 감사합니다.

교회와 정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현실 인식

 얼마 전에 이방호님이 자유게시판에 교회 지도자로서 정치적 색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궁금증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이방호님이 지적한대로 한미FTA 비준안 논의 과정에서 여야간에 끊임없는 정쟁과 갈등이 노출 되었고, 이 비준안이 통과되자 환영과 반대의 목소리가 뚜렷이 갈리면서 현 정치 세력에 대한 강한 불신과 함께 국민 사이에 반목과 갈등이 점점 커져 가고 있습니다.

 작금의 혼란한 한국 정치 지형과 극단적인 대치 상황을 내다 보노라면, 그렇잖아도 서민들은 날이 갈수록 팍팍해져가는 삶의 형편 때문에 시름만 깊어 가는데, 정치인들이 구호처럼 부르짖는 이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봄날은 도대체 언제쯤 올런지, 좀 편안하게 가족과 함께 TV 뉴스를 시청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언제나 경험해 볼 수 있을런지 참 요원하다 못해 절망의 깊이만 더해가는 요즘입니다.

 애초에 세속 정치인에게 그러한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어린 기대는 아니었는가 하는 자괴감마저 듭니다. 국민들이 낸 세비를 꼬박꼬박 받아 먹으면서 국민을 위한 정치는커녕 사회적 분란과 갈등만 양산하는 집권자들과 국회의원들을 보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통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좀 다릅니까? 이런 판국에 세상 사람들은 차치하고라도 믿는 성도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는가, 극도의 정치적 혼돈 상황 가운데 처해 있는 성도들이 믿고 따를만한 어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안을 제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되뇌어 봅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이역시도 긍정하기 힘든, 그래서 이 땅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그러하다보니 사회나 교회나 개인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쉽고 빠르게 움직여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만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SNS 등의 발전된 매체를 통하여 소견의 파급 속도와 영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세상(사회)은 그렇다하더라도 진리의 견고한 터가 되어야 할 교회마저 바람 앞에 놓인 촛불같이 위태롭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보니, 큰 소동이 일어날 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이제는 신자들마저 교회에 대하여 특별한 신뢰나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금의 한국 교회는 동네북 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갖는다고, 무관심하면 나몰라한다고 비난을 받습니다. 관심을 갖는대로, 반대로 무관심해지는대로 어느 편도 모두를 감동시키거나 설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정치, 사회 참여에 관한 역사적 통찰과 성경적 근거

 그렇다면 교회는 세속 정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사실 이러한 질문 자체를 진부한 물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어느 종교보다도 사회 참여에 활발하게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참여를 복음주의적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교회적 풍토는 나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멀게는 18세기의 웨슬리의 부흥운동으로부터 19세기에는 찰스 피니로 대표하는 2차 대각성 운동으로 소급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20세기 초반에는 복음주의와 대립한 자유주의 진영에서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라는 좀 더 급진적인 형태의 사회 참여 운동이 전개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2세계 대전 이후에 복음주의는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기독교 신앙과 사회 재건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서 교회의 사회 참여와 적용에 관한 논의를 본격화하기 시작하는데, 그 정점에서 이루어진 회의가 바로 1974년 7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회의’(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입니다. 150여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세계에 그리스도의 음성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모인 약 2,7000여명의 참가자들은 회의를 마치면서 로잔 협약(Lausanne Covenant)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규약에 따르면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회의 이후로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더 나아가 ‘사회적 책임’만을 말하지 않고, ‘정치, 사회적 참여’를 교회의 의무 사항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강조하는 분위기는 칼빈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 대륙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 카이퍼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엽에 걸쳐 네델란드에서 가장 탁월하고도 유명한 신학자, 법학자, 교육자였으며 수상으로서 기독교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뛰어난 정치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 중 하나인 ‘영역주권사상’(sounvereinteri t eigen kring)을 통하여 기독교의 현실 정치 참여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교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 학문, 예술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게 됨으로써 기독교인은 자기가 속한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그 사명과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네델란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교파를 떠나서, 심지어 칼빈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교회나 기독교 단체에서도 그의 주장을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주요 명분과 모델로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장을 작금의 한국 교회적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바른 일인지는 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만(이 점에 대해선 후반부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음), 이상의 아주 간단한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은 현대 교회는 교회의 정치, 사회 참여에 대하여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만한 명분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현대 복음주의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죤 스타트는『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라는 책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매우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조직 신학적(교리적) 관점에서 관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의 다섯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1)보다 완전한 신론, (2)보다 완전한 인간론, (3)보다 완전한 기독론, (4)보다 완전한 구원론, (5)보다 완전한 교회론의 필요와 수립을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으며, 결국에는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거나 ‘교회는 정치나 사회 참여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수구론자들의 딴지걸이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주의나 아브라함 카이퍼식의 신칼빈주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도의 사회 생활이 정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 차원에서 이해되어 집니다. 기독교인인 동시에 개별적으로는 성실한 사회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정치로 규정된 사회적 가치관과 규범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회인으로서 투표에 참여하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공동의 의사 결정 과정이나 구제나 자선이나 교육 활동에 참여하거나 시위나 반론권 보장을 통하여 정당한 견해를 표출하거나 국가에서 인정하는 정당이나 사회 기관에 속하여 활동하는 경우의 일은 신자나 불신자와 관계없이 헌법에 보장된 자유로운 정치적 행위에 해당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제한이 없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와 성도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한, 비정치적일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관점

 개혁신학적 관점에서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은 교회와 국가를 본질상 성격이 다른 두 왕국으로 보았지만 그렇다고하여 교회나 성도의 정치성을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고유한 권위를 인정하였습니다.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집권자에 대하여 그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았으므로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칼빈은 세속 정치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대리인들’이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칼빈은 국가의 정치제도나 정치 형태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연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민주주의에 가까운 귀족 정치’를 선호하였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재가 받은 정부 형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받아들이기 힘든 군주제에 대해서도 완전한 긍정도, 부정하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인 군주제보다는 복수 통치제를 지지하였습니다. 이러한 통치제도가 바르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의 자유로운 의사가 반영되는 보통 선거 체제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칼빈은 신자들이 세속 집권자를 선출하는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바람직한 정치적 행위로 보았습니다. 또한 신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집권자들이 세속의 칼(권력)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항상 감시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정치적 활동을 요구할 때에는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속 집권자에 대한 순종과 저항이라는 독특한 양상은 칼빈주의의 국가관 내지 정치관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저항이란 정부나 정치에 대하여 물리적이거나 폭력적인 방식의 저항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은 철저하게 힘을 힘으로 대항하는 저항을 부정하였습니다. 신자로서 취할 수 있는 저항이란 첫째는 실정법 테두리에서 백성들이 뽑은 관원을 통하여 저항하는 것과, 둘째, 개인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반대한 집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저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의 정신에 충실하되, 인내와 고난으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저항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칼빈주의에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가진 것이라도 폭력이나 봉기나 혁명을 통한 저항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더 심각한 죄의 부패와 방종과 타락한 개인주의를 낳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명분과 한계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에 대하여 지극히 부정적이며, 정치 현안에 대하여 개인적인 판단의 자유를 말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성경과 교회 역사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이 재세례파나 신령주의자들과 같이 극단적인 정교분리 정책을 고수한 이들을 경계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전히 교회에서 정교분리라는 원칙이 강조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모든 면에서 교회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는 국가 권력이나 세속 정치로부터의 지배나 간섭으로부터의 분리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세상에 있으나 속하지는 않는 영적 기관으로서의 본질적이면서도 독특한 면모를 유지하며 계승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관해서 기독교인 개인이나 기독교와 관계된 (공공 혹은 이익)단체와 교회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리스도인 개인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립된 관련 단체의 정치적 사고와 활동은 각자의 지식과 양심에 따라서 사회적 법과 도덕과 윤리와 상식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다소 자유롭고 유연성있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 지교회에 속해 있다고해서 모든 지체들이 동일한 정치 이념을 갖거나 같은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똑같은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넌센스입니다. 최근의 한미 FTA 협상 같은 현실적인 정치 사안에 대해서도 성도 간에 이견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는 그야말로 정치적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정치란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는 협상과 양보를 통해서 개인이나 단체가 더 많은 욕구를 해소하려는 본위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맞닥들이게 되는 정치적 사안들은 대개가 현재의 지배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모색한 인본주의적인 사상에 기초하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인권이나 복지나 정의를 추구하는 일도 기독교 복음과는 하등 상관없는 원리에서 비롯된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 현실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으로 보이는 정치적 사안들조차 성경 정신과는 동떨어진 보수적이며, 자유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거나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한 목적에서 고안해 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현실 정치를 폄하하거나 부정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집권자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고백이 거의 없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말그래도 현실 정치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식과 양심에 따라서 세상의 집권자와 정치인에게 하나님께서 원래에 그들에게 주신 성스런 기능을 바르게 수행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를 실천에 옮길 것을 촉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인 행동과 설득을 통하여 불신자들의 가치관에 도전을 주며, 만연해 가는 사회악과 부조리를 개선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이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식견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발굴하여 지원함으로서 세속 정치의 풍토가 기독교적인 정치 문화로 바뀌어가는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또한 기독교적인 원리에 충실한 입안은 아닐지라도 일반 은총적 관점에서 사회적 정의와 공평을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면 열린 자세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고, 정책 연대를 통하여 보다 유익하고 건전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앞서 언급하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적 시도와 결과물이 좋은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 신앙에 근거하여 정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네델란드 최초로 개혁 신앙의 원리를 실천 이념으로 삼는 정당을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서 본다면,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이 정당에 속한 국회의원의 숫자는 미비할 뿐만 아니라 당원도 개혁교회 성도들뿐입니다. 무엇보다도 화란의 개혁 교회들이 차츰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아 변질되어 감에 따라서 때로는 정당 이념에 반하는 정치적 현안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세속화된 사회에 기독교를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기독교의 본래적 가치를 부정적으로 여기게 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네델란드의 정치 환경은 우리나라와 매우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혁 정당은 작지만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제는 소수가 되어버렸지만 개혁교회와 개혁교회 성도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교회나 정치 현실과는 엄연한 차이점입니다. 역사적으로나 고백적으로 하나된 교회들과 성도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속 사회에서의 기독교 정당 활동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네델란드 교회나 아브라함 카이퍼의 예외적인 경우를 한국 교회나 사회에 무조건 적용하려는 시도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관점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특정한 정치적 사안이나 정책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특히나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하여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행동을 금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옳다고 여겨지는 사안과 정책일지라도 거기에다 자신의 신앙관을 투영하여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 명백한 규정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인들에 의해 구상된 특정 정책이나 입장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마련된 내용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동의나 공감을 표현하는 선을 넘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빼앗거나 무시하는 명백한 종교적 월권행위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탁월한 개혁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마이클 호튼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책임있는 행동을 하도록 세상을 촉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하나님 자신이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 특정 정책들이나 입장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세상의 포로된 교회』, p. 202)

 그러므로 목사나 교회 지도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하여 특정한 정치적 사안을 홍보하거나 부정하거나 혹은 강요하거나 빈정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일을 행할 때에 자신에게 마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수 있는 특별한 영적 권한이 있는 것처럼 행사하려는 것은 아주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비신앙적인 태도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명확하게 풀어 설명하되 성도 개인의 정치적 판단에 대하여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나 그러한 사안이 일반 사회에서조차 관점에 따라서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는 문제라면 자신의 의견을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인 것처럼 제시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정치 현안에 대한 성도 간에 이견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논쟁을 양산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계기로 유일하며 보편적인 진리의 본질과 가치를 더 풍성하게 드러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적 기관으로서의 교회적 사명
 
 여기에서 우리는 정치적 사안이나 판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기독교 단체에 용인된 일과 교회에 주어진 일차적 사명에 대하여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세속 정치나 공공 정책의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그것을 입안하거나 또한 그것에 대하여 찬성 혹은 반대하는 의견이나 민의를 수렴하고 대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교회는 특정 정치 세력이나 어떤 정치적 상황에 편을 들거나 반대를 도모하는 기구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사회적 권력과 이익과 통제력을 쟁취하려고 세운 기관도 아닙니다. 사회 속에서 한 제도나 기관의 성격으로 존재하는 교회일지라도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세상의 어떤 개인이나 기구나 기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이며 엄위롭습니다. 

 혹자들은 교회더러 항상 세속 정치에 민감하며, 공공정책에 호불호를 나타내며, 세상을 법리적으로 혹은 공리적으로 변화시켜 가는 일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심지어 국가를 기독교화하는 것이나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교회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구원과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교회에는 특별하고도 유일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원의(原義)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공권력이며 권력의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집단에게도 제한되거나 침해 받을 수 없는 교회만이 지닌 고유하며 독보적인 특징입니다.
 
 교회의 설립과 목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교회가 이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영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삼으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교회 가운데 허락하신 표지들과 은혜의 수단(말씀, 성례, 권징)을 통하여 지금도 전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이 세상과 사람들을 좀 더 나은 곳, 좀 더 잘사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목적들은 잃어버린 자들의 영혼을 깨움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과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 이끌어 주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할 때, 세상속의 교회라할지라도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구원의 경륜적 기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으로서의 기관인 교회에 구성원으로서, 또한 지체로서 머물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시대적 상황이나 형편에 놓여 있든지간에 성도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성령과 말씀에 의해 지배받으며, 바른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와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함게 하는 참된 교회라면 이 세상에서 이미 실현되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살피는 모든 분들이 살아생전 이 같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기도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2011. 12. 5


출처: http://cafe.naver.com/solideogloriafaith/3898
작성자: 주나그네(김병혁목사) 

5 ways we take God's mercy for granted(Spurgeon)

2011. 10. 11. 23:12 | Posted by dfcjoshua

Romans 2:4—"Or do you presume on the riches of his kindness and forbearance and patience, not knowing that God's kindness is meant to lead you to repentance?" God not only acts kindly to sinners, but when they misuse his kindness he labors to set them right (Isa. 1:18, Hosea 11:8). It is a sad thing that any who have seen God's judgments on others, and have escaped themselves, should draw from this special mercy a reason for adding sin to sin (Jer. 3:8).

5 Ways We Take God's Mercy For Granted
By allowing it to remain, unnoticed, ungratefully passing it over.
By claiming it as our due, and talking as if God were bound to bear with us.
By opposing its design, and refusing to repent (Prov. 1:24-25).
By perverting it into a reason for hardness of heart, presumption, infidelity, and further sin (Zeph. 1:12, Eccl. 8:11).
By urging it as an apology for procrastination (2 Pet. 3:3-4).

Adapted from Charles Spurgeon's sermon notes. 

Mercy of God(A.W.Pink)

2011. 10. 10. 02:16 | Posted by dfcjoshua
http://www.pbministries.org/books/pink/Attributes/attrib_14.htm


The Attributes of God 

by A.W. Pink

14. The Mercy of God

 "O give thanks unto the Lord: for He is good, for His mercy endureth forever" (Ps. 136:1). For this perfection of the Divine character God is greatly to be praised. Three times over in as many verses does the Psalmist here call upon the saints to give thanks unto the Lord for this adorable attribute. And surely this is the least that can be asked for from those who have been such bounteous gainers by it. When we contemplate the characteristics of this Divine excellency, we cannot do otherwise than bless God for it. His mercy is "great" (1 Kings 3:6), "plenteous" (Ps. 86:5), "tender" (Luke 1:78), "abundant" (1 Pet. 1:3); it is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upon them that fear Him" (Ps. 103:17). Well may we say with the Psalmist, "I will sing aloud of Thy mercy" (59:16).

 "I will make all My goodness pass before thee, and I will proclaim the name of the Lord before thee; and will be gracious to whom I will be gracious, and will show mercy on whom I will show mercy" (Ex. 33:19). Wherein differs the "mercy of God from His grace"? The mercy of God has its spring in the Divine goodness. The first issue of God’s goodness is His benignity or bounty, by which He gives liberally to His creatures as creatures; thus has He given being and life to all things. The second issue of God’s goodness is His mercy, which denotes the ready inclination of God to relieve the misery of fallen creatures. Thus, "mercy" presupposes sin.

 Though it may not be easy at the first consideration to perceive a real difference between the grace and the mercy of God, it helps us thereto if we carefully ponder His dealings with the unfallen angels. He has never exercised mercy toward them, for they have never stood in any need thereof, not having sinned or come beneath the effects of the curse. Yet, they certainly are the objects of God’s free and sovereign grace. First, because of His election of them from out of the whole angelic race (I Tim. 5:21). Second, and in consequence of their election, because of His preservation of them from apostasy, when Satan rebelled and dragged down with him one-third of the celestial hosts (Rev. 12:4). Third, in making Christ their Head (Col. 2:10; 1 Pet. 3:22), whereby they are eternally secured in the holy condition in which they were created. Fourth, because of the exalted position which has been assigned them: to live in God’s immediate presence (Dan. 7:10), to serve Him constantly in His heavenly temple, to receive honorable commissions from Him (Heb. 1:14). This is abundant grace toward them but "mercy" it is not.

 In endeavoring to study the mercy of God as it is set forth in Scripture, a threefold distinction needs to be made, if the Word of Truth is to be "rightly divided" thereon. First, there is a general mercy of God, which is extended not only to all men, believers and unbelievers alike, but also to the entire creation: "His tender mercies are over all His works" (Ps. 145:9): "He giveth to all life, and breath, and all things" (Acts 17:25). God has upon the brute creation in their needs, and supplies them with suitable provision. Second, there is a special mercy of God, which is exercised toward the children of men, helping and succouring them, notwithstanding their sins. To them also He communicates all the necessities of life: "for He maketh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on the good, and sendeth rain on the just and on the unjust" (Matt. 5:45). Third, there is a sovereign mercy which is reserved for the heirs of salvation, which is communicated to them in a covenant way, through the Mediator.

 Following out a little further the difference between the second and third distinctions pointed out above,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e mercies which God bestows on the wicked are solely of a temporal nature; that is to say, they are confined strictly to this present life. There will be no mercy extended to them beyond the grave: "It is a people of no understanding: therefore He that made them will not have mercy on them, and He that formed them will show them no favour" (Isa. 27:11). But at this point a difficulty may suggest itself to some of our readers, namely, Does not Scripture affirm that "His mercy endureth forever" (Ps. 136:1)? Two things need to be pointed out in that connection. God can never cease to be merciful, for this is a quality of the Divine essence (Ps. 116:5); but the exercise of His mercy is regulated by His sovereign will. This must be so, for there is nothing outside Himself which obliges Him to act; if there were, that "something" would be supreme, and God would cease to be God.

 It is pure sovereign grace which alone determines the exercise of Divine mercy. God expressly affirms this fact in Romans 9:15, "For He saith to Moses, I will have mercy on whom I will have mercy." It is not the wretchedness of the creature which causes Him to show mercy, for God is not influenced by things outside of Himself as we are. If God were influenced by the abject misery of leprous sinners, He would cleanse and save all of them. But He does not. Why? Simply because it is not His pleasure and purpose so to do. Still less is it the merits of the creature which causes Him to bestow mercies upon them, for it is a contradiction in terms to speak of meriting "mercy." "Not by works of righteousness which we have done, but according to His mercy He saved us" (Titus 3:5)—the one standing in direct antithesis from the other. Nor is it the merits of Christ which moves God to bestow mercies on His elect: that would be putting the effect for the cause. It is "through" or because of the tender mercy of our God that Christ was sent here to His people (Luke 1:78). The merits of Christ make it possible for God to righteously bestow spiritual mercies on His elect, justice having been fully satisfied by the Surety! No, mercy arises solely from God’s imperial pleasure.

 Again; though it be true, blessedly and gloriously true, that God’s mercy "endureth forever," yet we must observe carefully the objects to whom His "mercy" is shown. Even the casting of the reprobate into the Lake of Fire is an act of mercy. The punishment of the wicked is to be contemplated from a threefold viewpoint. From God’s side, it is an act of justice, vindicating His honour. The mercy of God is never shown to the prejudice of His holiness and righteousness. From their side, it is an act of equity, when they are made to suffer the due reward of their iniquities. But from the standpoint of the redeemed, the punishment of the wicked is an act of unspeakable mercy. How dreadful would it be if the present order of things when the children of God are obliged to live in the midst of the children of the Devil, should continue forever! Heaven would at once cease to be heaven if the ears of the saints still heard the blasphemous and filthy language of the reprobate. What a mercy that in the New Jerusalem "there shall in nowise enter into it any thing that defileth, neither worketh abomination" (Rev. 21:27)!

 Lest the reader might think that in the last paragraph we have been drawing upon our imagination, let us appeal to Holy Scripture in support of what has been said. In Psalm 143:12 we find David praying, "And of Thy mercy cut off mine enemies, and destroy all them that afflict my soul: for I am Thy servant." Again; in Psalm 136:15 we read that God "overthrew Pharaoh and his hosts in the Red Sea: for His mercy endureth forever." It was an act of vengeance upon Pharaoh and his hosts, but it was an act of "mercy" unto the Israelites. Again, in Revelation 19:1-3 we read, "I heard a great voice of much people in heaven, saying, Alleluia; Salvation, and glory, and honour, and power, unto the Lord our God: for true and righteous are His judgments: for He hath judged the great whore, which did corrupt the earth with her fornication, and hath avenged the blood of His servants at her hand. And again they said, Alleluia. And her smoke rose up forever and ever."

 From what has just been before us, let us note how vain is the presumptuous hope of the wicked, who, notwithstanding their continued defiance of God, nevertheless count upon His being merciful to them. How many there are who say, I do not believe that God will ever cast me into Hell; He is too merciful. Such a hope is a viper, which if cherished in their bosoms will sting them to death. God is a God of justice as well as mercy, and He has expressly declared that He will "by no means clear the guilty" (Ex. 34:7). Yea, He has said, "The wicked shall be turned into hell, all the nations that forget God" (Ps. 9:17). As well might men reason: I do not believe that if filth be allowed to accumulate and sewerage become stagnant and people deprive themselves of fresh air, that a merciful God will let them fall a prey to a deadly fever. The fact is that those who neglect the laws of health are carried away by disease, notwithstanding God’s mercy. Equally true is it that those who neglect the laws of spiritual health shall forever suffer the Second Death.

 Unspeakably solemn is it to see so many abusing this Divine perfection. They continue to despise God’s authority, trample upon His laws continue in sin, and yet presume upon His mercy. But God will not be unjust to Himself. God shows mercy to the truly penitent, but not to the impenitent (Luke 13:3). To continue in sin and yet reckon upon Divine mercy remitting punishment is diabolical. It is saying, "Let us do evil that good may come," and of all such it is written, whose "damnation is just" (Rom. 3:8). Presumption shall most certainly be disappointed; read carefully Deuteronomy 29:18-20. Christ is the spiritual Mercy-seat, and all who despise and reject His Lordship shall "perish from the way, when His wrath is kindled but a little" (Ps. 2:12).

 But let our final thought be of God’s spiritual mercies unto His own people. "Thy mercy is great unto the heavens" (Ps. 57:10). The riches thereof transcend our loftiest thought. "For as the heaven is high above the earth, so great is His mercy toward them that fear Him" (Ps. 103:11). None can measure it. The elect are designated "vessels of mercy" (Rom. 9:23). It is mercy that quickened them when they were dead in sins (Eph. 2:4,5). It is mercy that saves them (Titus 3:5). It is His abundant mercy which begat them unto an eternal inheritance (1 Peter 1:3). Time would fail us to tell of His preserving, sustaining, pardoning, supplying mercy. Unto His own, God is "the Father of mercies" (2 Cor. 1:3).

"When all Thy mercies, O my God,
My rising soul surveys,
Transported with the view I’m lost,
In wonder, love, and pr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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