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macarthurcommentaries.com/Archive.aspx?question=438#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세상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은 본래 양립할 수 없다(cf. 4:5-6; 5:4-5; 요15:19; 갈6:14).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이며, 대립한다. 그들은 정반대이고,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이 특징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세속의 사람들도 복음과 주님에 대해 참된 애정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요3:20; 행7:51; 13:8-10; 17:5, 3; 롬8:7; 골1:21; 살전2:14-16).
분명히, 하나님의 것들과 세상의 것들 사이에는 확실한 경계선이 있다. 현대 문화 속에서 진행 중인 도덕과 윤리적 퇴보는 이를 분명히 해준다. 잠시만 생각해도 성경적 기독교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많은 문화적 의제들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 페미니즘에 의한 전통적 가족상에 대한 비난, 성적 난잡함과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조장, 폭력에 대한 수용의 증가, 세속의 매체로 인한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강조, 개인적 고결함과 사업 윤리 기준의 지속적인 감퇴, 포스트 모던의 상대주의에 의한 옳고 그름의 손상 등이 그런 예이다.
요한은 자신의 충고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세부 내용이나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신자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일반적인 이유-그들이 누구이며, 세상은 무엇을 하고, 세상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를 제시한다.
신자들은 용서받았고(시 86:5; 130:3–4; 사 1:18; 마 26:28; 눅 1:77; 엡 1:7; 4:32; 골 1:14; 2:13–14; 3:13; 요일 2:12),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졌고(고후 2:14; 4:6; 엡 4:13; 골 1:9–10),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고(시 119:11; 골 3:16), 사단을 이기고(약 4:7; 요일 4:4),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요일 2:12–14),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데마와 같은 영적 배교자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아무 것도 아니었고, 거짓이었음을 보여준다(2: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자의 기본 정체성이 세상의 유혹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않는다. 비록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진실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서의 행실과 참여로 그들의 남은 육체를 통해 시험을 당한다(마 26:41; 고전 10:13; 갈 6:1; 엡 6:16; 약 1:12–14; 벧전 5:8–9). 시험이 세상적인 우선순위나 세상적인 즐거움이나 세상적인 부나 세상적인 정욕으로부터 오든지 아니든지 간에, 신자라면 그들을 유혹하는 세상의 노력에 저항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참조 마6:19-21, 24)고 경고하셨음을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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