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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세상의 제자도-4/6

dfcjoshua 2011. 8. 31. 13:02
페이스북으로 된
 그러나, 수업 후에 한 학생이 자신이 다니는 새로 뜨는 교회가 페이스북 때문에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 말해줌으로써, 내가 가진 또 다른 의심을 재확인 시켜주었다. 이 특별한 공동체는 모든 광고와 관계와 반응을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하였다. 오래지 않아 새신자들의 제자화는 IM으로 하게되면서, 설교와 기도는 단순히 게시되었고, 모임은 온라인으로 해결되었다. 그 학생은 “그것은 매우 흥미로웠다.”라고 말했다. 휴대전화에 있는 페이스북 앱은 당신이 주머니에 교회를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하고 페이팔을 통해 헌금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물론, 교회 안의 소셜 네트워킹은 더욱 배타적이 되었다. 어쨌든 페이스북은 통로 혹은 여과기이라서, 결과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은 미리 차단되거나 배제되었다. (복음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 IM의 울타리는 가십을 위한 공개토론장이 되었다. (친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했다.) 네트워크 통로가 교리교사와 학습교인 간의 완충지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제자훈련을 위해 실제로는 만나지 않았다. 4년 만에 그 교회는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페이스북의 배타성이 더 넓은 기독교세계에서 그들을(사실, 서로를) 삭제했다. 매체가 메시지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침내, 그들은 여전히 혼자 볼링을 치고 있다. 단체 혹은 교리문답식 제자도의 레인을 위해 집을 떠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페이스북이 그들 교회의 원동력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Wii’로 볼링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배웠다.
 이런 경우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사이버 해결책은, 거대한 배제와 고립 속에서 물도, 빵도, 와인도 없고, 1s와 0s를 통해 어떤 생물도 전달되지 않는 온라인 상에서는 제자는 만들어질 수도 훈련될 수 없음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 것으로 끝났다. “가지고, 먹는”(마26:26) 교인들을 요구하는 교회에서 그렇게 되는 것은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페이스북의 방법론은 제자화 과정 안에서와, 인격과 기질과 감정과 바디랭귀지의 문제를 설교하는 것 속에서, 대인관계의 약속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멘토링 환경을 세울 수 없다. 이것은 오직 누군가 거기 있을 때, 정말 거기 있을 때에만 나타난다. 이메일을 쓰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도 한 방법 이지만 개인적 참여를 통해 자신을 주는 것은 전체적으로 차별화되고 향상된 수준 위에 제자도를 세운다. 개인적 참여가 은사 나눔의 본질이다(요3:16).
 모든 “우정”을 온라인에서 만들기 때문에, 포옹이나 악수, 눈맞춤도 없다. 그것이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의 아이러니다. 페이스북의 방법은 실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메시지다. 마이스페이스는 자리가 없다. 친구들은 파일이고, 대화에는 소리가 없다. 템플릿은 개별화를 만든다. 게다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부인할 때, 가상의 영역을 의지하는 교회와 교리교사들은 잘못된 신학적 메시지를 보낸다. 양떼가 이더넷에 매달려 있다면, 그 때 목자는 어떻게 되는가?
 가상의 영역은 인성의 전체(정신, 의지, 감정, 육체)를 담은 교리교사와 학습교인의 관계라는 교회의 설정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구체화된 전달 매체를 통해 크리스천의 믿음과 실천의 본질을 보여준 이래로 제자도는 반드시 얼굴을 맞대고 이루어져야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살아있는 매체는 살아있는 메시지를 살아있는 사람에게 전달하므로 진실한 제자도는 개인의 참여가 요구된다.
 안수 받은 사역자로서, 구역원들에게 문자 메시지, 이메일, 전화를 하기도 하고, 함께 있기도 한다. 목회심방은 전자적 의사소통 수단과는 구별된 큰 비중을 가지며, 마찬가지로 그 영향도 다르다. 구식인 교리문답으로 배운 제자들은 목회자가 저장된 e-메시지 보다 함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세상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오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도로의 위임이 완수되기 위해서 목회자는 세례를 주고, 용서를 선포하고, 성찬을 행하고, 긍휼히 여기고, 상담하고, 교리문답을 하기 위해 존재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제자(교사든지 배우는 자든지)가 되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희생으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인류를 위해 친히 그곳에 있어야 했던 실제적이고, 절박하고, 진실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음성과 소리의 물리적 현상, 사람의 감정과 열정의 힘, 그리고 감동시키는 것이 흙으로 만든 사람을 통한 성령님의 사역 속에서 진실로 효과적인 도구이다. 이것이 진짜 세상에서 예수와 제자도에 대한 높은 기대이다. 반대로, 페이스북 세상에 사는 크리스천들의 기대는 낮다. 목회자는 평면 스크린의 이미지이다. 마치, 여러 지교회의 설교 방송이 스마트폰에 잇달아 나오는 유명 목회자와 같다. 당신은 목회자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스스로 교리문답이나 병문안을 받게 된다. 그렇게 제자도는 당신이 접속하고 싶은 때에 이뤄진다. 자신을 주는 사랑이 결여된 위험 부담 없는 영역에서의 사이버 사회화의 편리함은 바로 복음주의의 무지를 영속화시킨다. 왜냐하면, 한 사람으로는 제자가 되지 않고, 예수님을 배우는 자도 되지 않는다. 제자는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정말 모이는 곳에서 생긴다.
원문보기 Face-to-Face Discipleship in a Facebook World (John B. Bombaro)
http://www.modernreformation.org/default.php?page=articledisplay&var1=ArtRead&var2=1260&var3=issuedisplay&var4=IssRead&var5=119
Rev. John J. Bombaro (Ph.D., King's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is the parish minister at Grace Lutheran Church in San Diego, California and a lecturer in theology and religious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San Die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