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fcjoshua
2011. 10. 3. 12:10
This is an article from the September-October 2011 issue Making Disciples.
September 01, 2011 by Sarita D. Gallagher and Steven C. Hawthorne
(원문보기:http://www.missionfrontiers.org/issue/article/blessing-as-transformation)
(원문보기:http://www.missionfrontiers.org/issue/article/blessing-as-transformation)
저자소개
Sarita D. Gallagher is Assistant Professor of Religion at George Fox University in Newberg, Oregon. She served as a full-time missionary with the Christian Revival Crusade movement teaching biblical theology and intercultural studies in Papua New Guinea and Australia.
Sarita D. Gallagher is Assistant Professor of Religion at George Fox University in Newberg, Oregon. She served as a full-time missionary with the Christian Revival Crusade movement teaching biblical theology and intercultural studies in Papua New Guinea and Australia.
Steve Hawthorne co-edited, with Ralph Winter, the Perspectives Reader and authored the Perspectives Study Guide. He works with WayMakers, a mission and prayer mobilization ministry. He travels widely helping the Perspectives course get underway in strategic settings.
편집자 주:
전도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려는 노력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통로가 되거나 혹은 복 주시는 일을 함께 할 수 사람들을 모으시고 계시는 것을 본다. 이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풍요,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라는 여러 국면을 갖는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전인류 가운데 복을 약속 받은 민족이 될 제자 공동체의 모집을 가속화시킨다. 그러므로 (최초의 모집이 되는) 전도와 (그 모집을 성숙으로 이끄는) 제자도는 다른 모든 사역의 토대이며, 전인류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복을 깨닫는 시작이다. 이런 모집이 실제적으로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경우라면, 중요도가 아닌 순서로써, 전도와 제자도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복이나 변화는 번성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미션 퍼스펙티브 4판(2009년)’에 게재된 동일한 제목의 글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전도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려는 노력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통로가 되거나 혹은 복 주시는 일을 함께 할 수 사람들을 모으시고 계시는 것을 본다. 이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풍요,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라는 여러 국면을 갖는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전인류 가운데 복을 약속 받은 민족이 될 제자 공동체의 모집을 가속화시킨다. 그러므로 (최초의 모집이 되는) 전도와 (그 모집을 성숙으로 이끄는) 제자도는 다른 모든 사역의 토대이며, 전인류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복을 깨닫는 시작이다. 이런 모집이 실제적으로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경우라면, 중요도가 아닌 순서로써, 전도와 제자도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복이나 변화는 번성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미션 퍼스펙티브 4판(2009년)’에 게재된 동일한 제목의 글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로는 세상에게 주신 약속이다. 창세기 12:1-2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뿐만 아니라, 아브람이 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3절은 복의 거대함을 보여준다.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족속들에게 복이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비록 아브람이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즉각적으로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파악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다음 수 년 동안 반복해서 들으면서 이 완전한 약속은 영토, 족속, 복이라는 세가지 영역을 갖게 되었다. 영토와 족속이라는 처음 두 영역은 아마 즉각적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수수께기로 남아있는 것은 마지막 약속, 곧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족속을 통해서 복이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나 자녀를 얻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같아 보이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잘 한다.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는 약속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성취되고 있는 중인가? 나라와 족속들이 복을 받는 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청지기가 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복”은 무슨 의미인가?
만약 창세기가 유일한 근거라면, 우리는 복의 개념에 대해 여전히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창세기에서 “복”이라는 단어는 복의 선포와 자질을 묘사하는데 쓰였다. 그것은 미래적 운명이나 선한 행동이 언급되는 행위라서, 복을 받은 사람이나 실체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이라는 용어는 약속된 것, 곧 물질이나 다른 것이 성취된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에 동물과 인류가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인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 하라”를 수행할 수 있는 복을 선언하셨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에서 피조물, 인간, 가족, 민족들 안에서 복이 성취되었을 때, 그들은 번성하게 되어 계획된 충만함과 운명을 향해 나아갔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어떻게 복의 약속이 명백하게 성취되는지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확인한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끝날 무렵,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24:1)는 것을 읽는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는 다양한 방법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창세기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복에 대한 세 가지 넓은 범주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질적 부와 결실로써의 복이다(24:35, 30:27, 30).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복이다(14:19-20, 21:22, 26:22). 세 번째는 족속들과 민족들 가운데로 화목함의 수단을 가지고 오는 복이다.
아브라함 족속을 넘어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족속이 복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창세기의 아브라함 족속의 이야기들 속에서 나라들이 복을 받는 것도 보았는가?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족속이 때때로 복이 되는 것을 본다. 아브라함은 그의 외국인 후원자들에게 끔찍한 결과를 주는 거짓말을 한다(12:10-20, 20:1-18). 야곱의 아들들은 가나안 한 도시 전체의 남자들을 전멸시킨다(33:18-34:31). 이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 다른 나라들에게 도움을 가져다 주셨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모든 물품과 식량을 강탈했던 기습부대에 포로로 잡혔던 소돔과 고모라 성을 구하러 왔다(창14). 이로부터 머지않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소돔성 전체(그가 이미 포로에서 구해준 몇몇을 포함하여)를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롯과 그의 가족뿐 아니라, 성 전체를 변호하였다(19:28). 비록 그 성이 파괴되었지만,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이 그 성 전체를 구하기 위해 중보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끝 무렵에,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을 선포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확한 말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곳은 공적인 장소였다.
창세기의 절정은 요셉의 이야기이다. 그보다 앞선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요셉의 업적들이 보인 엄청난 생산력은 이를 보는 외국인들로 하여금 요셉과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풍요를 가져다 주셨다고 결론을 내리게 하였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여호와께서 그가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였다”(창39:3). 그의 주인은 요셉 때문에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의 모든 소유 위에 내렸다”(39:5)는 것을 깨달았다.
애굽과 온 세상 민족을 축복함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7년 기근을 예언하는 해몽을 주셨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요셉의 지혜를 인정하여, “내가 너를 애굽 전역을 다스리는 총리로 임명한다”라고 선포했고, 게다가 “네 허락이 없이는 애굽 땅에서 손발을 놀릴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선포하였다(41:41,44). 기근이 왔을 때, 그 황폐함이 온 지면을 휩쓸었다”(41:56). 요셉은 세상의 모든 민족이 요셉에게 곡식을 사러 오면서(41:57), 많은 나라들에게 복을 확장시키는 자리에 있었다.
7년 기근의 두 번째 해에, 요셉은 돈과 가축으로 교환하는 방식을 통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47:14-17). 기근의 마지막 해에, 요셉은 애굽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땅의 국유화와 20% 세금(대부분의 봉건제도와 비교해서 아주 관대한 합의)의 대가로, 요셉은 기근 후에 농사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파종할 씨앗으로 쓸 곡식을 주었다(47:18-24). 장기적 생존에 대한 소망을 가진 채 기근이 끝남으로써, 사람들은 “당신이 우리의 삶을 구했습니다!”(47:25)라고 말했다.1
나중은 더 창대하리라: 자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들에 대한 복을 이해했는가? 특히, 그 약속의 결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다섯 번 동안, 하나님은 나라들에게 약속하신 복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더욱 상세하고 뚜렷하게 설명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입양시키는 방법을 주시려고 오신 것을 잘 알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들을 보내셨다…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수 있게 할 아들을”(갈4:4-5)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선 몇몇 구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 족속의 일부가 되는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고 말한다. “당신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약속에 따라 상속자이다”(갈3:29).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복이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 단어는 많은 자손들을 의미하는 “집합적 단수”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는 한 명의 자손이거나, 자손의 무리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일까?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둘 다 맞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주 탁월한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가 있다: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다수를 언급하는 ‘그리고 자손들에게’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고 너의 자손’ 한 명에게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시다”(갈3:29).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한 자손이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족속이 된 후로, 약속은 그것을 상속받은 자들의 믿음으로 성취되고 있는 중이라고 선포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께서 헬라인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실 것을 내다보는 성경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선포했다”(갈3:7-9).
그리스도는 이제 저주를 끝내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는 문을 여셨다. 이제 세상의 모든 족속으로부터 온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족속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나라들에게 복이 되기 위해 복이 된다는 모든 하나님의 가족의 유산을 상속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임무가 된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하여 나라들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두에게 명령을 가져다 준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 섬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정확하게 고려한다.2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추구하는가? 복의 약속은 중요한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임무를 만들고 통합한다.
관계적인 복: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기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백성, 곧 자녀로서 하나님께 속하는 특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두에게 아브라함의 족속이 되는 문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하고,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모든 민족과 종족과 씨족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일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 나라들에게 복을 가지고 온다는 의미에 있어 더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직 완전히 전달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의 복이 오늘날의 민족에게 찾아왔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 하나님의 복이 성취됐을 때, 어떤 모습일까? 모든 민족으로부터 적어도 몇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날을 기대할 수 있다. 나라들의 복은 전도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확실히 각 민족의 복음화를 의미할 수도 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역동적으로 함께 하시는 증거를 나타내심을 보았다.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제자들의 그룹들이 나라들 중에 나타나고 자라남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민족들 중에 계실 것이다.
물질과 사회적 복: 풍요와 평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는 복이 각 민족 가운데 실현 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이 의미 있는 모양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이상적인 완전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부분적으로 알게 된 강력한 소망-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시고, 나라들 중에 복의 중요한 수단을 생기게 하심-을 가지고 일하고 기도할 수 있다.
나라들을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어떤 모습일까? 물론, 각 지역과 민족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복을 생기게 하실 것이다. 정의와 의와 함께 번창하는 경제, 모든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농업과 산업, 그리고 공동체와 민족들과 인종들마다 나타나는 평화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질병과의 전쟁을 벌이고, 가난의 악순환을 끊고, 사막에 물을 공급하고, 파멸 중에 치료자로 나타나게 하시기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이 요셉의 예를 좇는 삶을 보전하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창세기 18장에서 소돔성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많은 도시들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도에서 하나님께서는 몇몇의 의로운 사람들로 인해 온 성읍이 죄의 즉각적인 결과를 받지 않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열 명도 없었다. 지금은 수백만의 믿음의 가족이 세상의 많은 도시들에 퍼져있다.
변화의 복
최근에 “변화”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로 희망을 피력하게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그리스도의 정의와 인격을 반영하는 사회 속에서 또한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성공적인 전도 너머로 향한다. 하나님나라의 희망과 실체를 다루는 수많은 성경본문 속에서 사회적 활동을 동반한 통합적인 전도의 성경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견실하고 전략적인 전체론을 지지하는 성경적 진실의 다른 부분을 간과해왔다는 의미일 수 있다. 복에 대한 하나님의 오랜 약속은 사회적 변화의 추구와 세계 복음화의 완성을 통합하는 생생하고 풍성하며 강력한 뼈대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 결과가 중요한 변화를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세상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계획하며 함께 일해야 한다. 여기서는 왜 복에 대한 아브라함의 약속이 그 뼈대를 제공하는지 여섯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통해, 그들과 함께 일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의도를 갖고 전략과 희망 그리고 모든 은혜와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수단을 동원하여 일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과 생명으로 그 백성들의 사역을 고취시키신다. 복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백성들의 사역 간의 상관적 요소이다. 복은 항상 모든 인간의 노력을 합한 것보다 우위에 있다.
2. 증가와 충만 그러나 완전함과 유토피아로는 절대 이르지 못함.
복을 받은 지역이나 민족이 완벽한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복을 갈망하는 것은 우리로 사회가 영적, 관계적, 신체적, 경제적, 미적, 환경적인 모든 영역에서 번영하도록 기도하고 일할 용기를 준다.
3.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정되지 않음.
하나님의 백성들이 확실하게 복을 받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복이 그 백성을 넘어 확장되기를 원하신다.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거부되는 것과 상관없이, 전체 도시와 나라들이 잘 사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다.
4. 재분배보다 성장.
관대함은 확실히 성경적 관점으로 복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미덕이다. 그러나 복이 되는 것은 단순히 보이는 곳에서 공평하게 부를 나누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복의 기본 개념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생명이 증가하고 풍요와 충만에 이르는 것이다.
5.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복
창세기 전체에서 하나님께서는 허약하고,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통해 큰 복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이 되는 것은 세상의 관점으로 부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독점적인 특권이 결코 아니다.
6. 복은 다양하고, 천천히 만들어지고 오래간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생각되는 변화는 종종 수년에 걸쳐, 몇 세대에 걸쳐, 때로는 몇 나라들에 걸쳐 일어난다. 복의 실현은 유사하게 나타나지만, 민족과 장소에 따라 동일한 방법으로만은 나타나지는 않는다.
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동역자
창세기의 이야기 속에서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광범위하고 분명한 예언자적 이야기를 발견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목적과 우리의 사명을 구체화시키면서, 우리의 사명은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변화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의 요점은 하나님의 선교가 사회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복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생명을 주는 능력과 함께 우리에게도 최상의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의 약속의 성취를 계속하심으로써, 우리는 아브라함 족속의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지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복을 가져다 주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창세기의 인물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요셉이다.
1. 하나님과의 동역
요셉은 하나님과 동역했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일하셨다.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을 때, 그 기적적인 증가가 “하나님의 복”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은 요셉의 성실과 지혜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배가되었다. 우리는 요셉에게 해몽하는 능력을 주시면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그러나 이는 애굽인들이 기근에서 살아 남도록 하시고, 경제적이고 농업적 풍요를 회복시키시는 장기적 계획을 마련하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기술과 지혜였다.
2.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함
요셉은 노예였을 때에도 성실히 일했고, 그 결과 복이 주인의 모든 일에 풍성하게 나타났다. 바로의 지하감옥에 죄수로 있을 때조차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판명되어 감옥의 제반 일을 맡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셨기”(창39:23) 때문이다. 요셉은 거대한 제국 안에서 권력의 최정점까지 올라섰다. 그 자리에서 요셉은 많은 생명을 살리고, 애굽의 비옥한 농업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쓰임받았다.
3.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써 섬기기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요셉은 가족에게 잔인한 일을 당하고, 노예로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감옥에서 부당하게 고발을 당하고 잊혀진 희생양이 된 스토리 속에서 살았을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행복을 훨씬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뭔가를 계획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나님은 악한 것을 계획한 환경을 선한 것으로 사용하셨다(50:20). 요셉은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전하시기 위해 당신들보다 앞서 나를 보내셨다”(45:5)라고 말했다. 요셉은 어떤 종류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에 대한 인식을 말로 표현해낸 성경 속의 첫 번째 사람이다.
4. 하나님의 목적을 완수함
요셉이 그렇게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 완수하시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생명을 보전” 하는 것이었다. 요셉은 가족의 생명을 보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들의 생명을 구했소!”(47:25)라는 애굽인의 감사는 애굽과 가나안 전역의 구원받은 생명에 대한 더 커다란 이야기를 말해준다.
여러 해에 걸쳐 펼쳐진 하나님의 더 큰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셉은 그의 유골이 위대한 애굽인의 방식대로 매장되도록 미리 준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셉은 그의 유골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창50:25, 히11:22)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요구했다. 요셉은 그의 생애가 끝나고 나서 완성될 목적을 추구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늘을 응시하고, 별을 세면서, 그의 족속이 엄청난 수가 될 것을 믿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밤하늘 이상의 것을 보았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다. 수많은 자녀들이 복을 받고 세상의 모든 민족 중에 복이 되는 그 날을 보았다. 그가 기쁨으로 옮겨 다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아비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게 될 것을 기뻐했다. 마침내 그는 보았고 기뻐했다” (요8:56).
미주
1. 어떤 사람들은 요셉의 행동을 땅의 소유주를 피폐하게 만든 것을 부정하는 약삭빠른 행동이라고 해석한다. 그런 설명은 많은 생명이 구원받은 것을 강조한다. 고대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을 휩쓸어버린 대부분의 기근의 관점에서 볼 때, 많은 통치세력들은 인구의 대다수를 천천히 굶어 죽게 두었을 가능성을 따른다면, 요셉이 한 일은 구원의 사역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농업적 풍요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축복의 행위로 생각되어야 한다.
2. 창세기 12:2에서 히브리어 표현 “복이 되는 것”은 명령형이다. 그렇다면 이 동사는 아브람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복이 되라는 분명한 명령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명령형일지라도, 전체적 표현에 대한 문법은 그에 앞서 이 구절을 즉각적으로 목적을 표현해내는 힘 있는 방식인 세 개의 병행적 히브리 동사로 틀을 잡아준다(아브람을 큰 나라로 만들고, 복을 주고, 그에게 명성을 만들어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