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arthur's answer

믿음의 기도란 무엇인가?(야고보서5)

dfcjoshua 2011. 12. 17. 00:39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4-15)

 다양한 그룹들이 자신들만의 특수한 믿음을 옹호하는 증거 구절로 이말씀을 사용해 옴으로써, 주석가들에게 이 구절은 몇 세기에 걸쳐 해석의 전장터와 같았다. 언뜻 보아서는 아픈 성도들이 장로들의 기도로 육체적 치유를 기대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야고보 사도의 괴로움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냉대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을 차치하고라도, "아스테네오(astheneo)"는 신약성경에서 18번이나 육체적인 병으로 번역되어 있다(마10:8; 25:36, 39; 막6:56; 눅4:40; 요4:46; 행9:37). 하지만 14번은 감정적이고, 영적인 나약함으로 번역되어 있다(행20:35; 롬4:19; 8:3; 14:1-2; 고전8:11-12; 고후11:21, 29; 12:10; 13:3-4, 9). 의미심장하게도 서신서에 있는 "아스테네오"는 세 군데(빌2:26-27; 딤후4:20)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육체적인 질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후 12:10절의 "아스테네오"의 용례는 더욱 주목할만한데, 그것이 인생의 고됨으로 생긴 연약함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고보서의 구절들도 유사한 문맥 가운데 있다.

 서신서에서 주로 사용된 용례와 일치하는 "아스테네오"의 번역 "연약한(weak)"은 이 말씀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한다. 이전의 관점에서는 고통으로 연약해진 사람들을 특별히 고통받는 신자라고 불렀는데, 야고보 사도는 이를 넘어선다. 이제 연약한 자들은 영적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고, 고난을 감수할 능력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사한 영적 군사들이고, 지치고, 기진맥진하며, 낙심하고, 패배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몸부림치지만, 의욕을 상실하고 죄악된 행실에까지 빠져 있다. 그렇게 바닥을 치면서, 그들은 사실상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영적으로 연약한 자들은 영적으로 강한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살전 5:14 참조).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도움은 교회의 장로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강한 자들이며,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이고, 영적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이다. 연약하고 패배한 신자들은 그런 장로들을 찾아가 그 힘을 의지할 것이다. 그들은 부를 것이고, 장로들은 와서 그들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그것이 갈6:1에서 사도바울이 표현한 것과 같은 생각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 지치고 상한 양들은 목자에게 갈 것이다. 목자는 그들을 중보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새 힘을 주시길 구할 것이다.

 이는 거의 등한시 되었던 목회자와 장로의 중요한 사역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6:4)고 말했을 때, 사도들은 그것의 우선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에서 약하고 분투하는 신자들이 종종 소위 전문 상담가들에게 넘겨진다(그들은 대개 기도에 있어서는 능력이 거의 없다). 영적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인간적인 지혜로운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영적 지도자들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해져야 한다.

 장로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는 것은 어떤 상직적인 예식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알레이포"(기름을 붓다, 바르다)는 신약 성경에서 의례적인 기름부음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신약성경의 "알레이포"는 누군가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마6:17; 참조 7:46), 예수의 몸에 여인들의 기름부음(막16:1), 예수님의 발에 마리아의 기름부음(요11:2; 12:3), 그리고 아픈 자들에게 기름을 바름(막 6:13)을 묘사한다. 이 구절을 번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문질러 바르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기름을 바른 후에"라고 읽는다.

 핍박때문에 몸에 물리적인 상해를 가진 신자들(눅 10:34참조)에게 문자그대로 장로들이 기름으로 문질러 줬을 수도 있다. 원시적 상태에서는 의학은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믿을만한 의사들은 거의 없었다. 장로들 편에서는 맹수에게 물린 상처나, 혹독한 대우 아래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쑤시는 곳을 기름으로 문질러 주는 것이 인자하고 친절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연약하고 무력한 신자들에게 기름을 발라주는 것은 장로들이 사람들을 격려하고, 기운을 북돋고, 튼튼하게 하고, 새롭게 하는(눅7:46참조) 책임을 시사한다.

 장로들의 중보와 회복의 사역은 주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진실한 성경적 격려는 하나님의 속성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예수께서 행하셨을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께서 원하실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것은 예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요14:13-14참조).

 장로들의 위로와 중보 사역의 은혜로운 결과는 믿음으로 드린 그들의 기도가 병든 사람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병든(sick)"이라는 것은 오해이고, "캄노(kamno)"의 최선의 번역은 아니다. 다른 신약 성경의 용례(히12:3)에서 "캄노"가 육체적 질병을 말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연약하고 무력한 신자들의 영적회복을 말한다. 또한 회복하다라는 뜻의 "소조(sozo)"가 반드시 육체적인 치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가장 일반적으로는 "구원하다"라고 신약 성경에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는 장로들의 기도가 연약하고 무력한 신자들을 영적 침체로부터 구원하는 것이고, 영적 완전함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경로가 아니라 그들의 기도이다. 물론 연약한 자를 들어올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에게이로(egeiro)"는 "자각시키다"나 "깨우다"를 의미할 수 있다. 경건한 자들의 의로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친 양들의 열정을 회복시킬 것이다.